> 문화와역사 > 인물
 
  무형인간문화재(담뱃대) 秋正烈

출생지 / -

원광대학교 문리과대학 오융경(吳隆京)교수는 지방민속전래 산업보고서에서 오동상감연죽(烏銅象嵌煙竹)을 생산하는 둔남면 오수리 268번지 추정열(秋正烈)씨 (1927년 11월 25일생)는 『전국유일한 오동상감연죽(烏銅象嵌煙竹) 제작 기능보유자이자 생존자』라고 기록했다. 오동이란 검붉은 빛이 나는 구리를 통칭하는데 대부분 동1돈에 금1푼의 비율로 합금한 것을 말한다. 상감은 금속, 도자기, 목재 따위의 겉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파고 그 속에 같은 모양의 다른 재료를 박아 넣는 기술을 말한다. 시골장날 장터길목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하던 담뱃대장사의 모습이 선한데… 쇠나 옥돌 그리고 은으로 만든 물부리(입에 물고 빠는 자리에 끼운물건)와 살담배를 넣어 피우는 담배통 기호에 맞게 길고 짧게 장죽과 곰방대로 만들던 설대가 가지런히 진열된 채 오가는 손님을 접대하던 담뱃대장사는 영영 우리 주변을 떠났다. 또는 풀무질하면서 목이 끊긴 담배통을 이어주고 두동강이 난 물부리를 때워주던 연죽장(煙竹匠)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긴 담뱃대를 늘이운 채 뻐금뻐금 심호흡하면서 허공에 천만가지 추억과 사고내품던 훈장의 근엄한 모습도, 곰방대를 등에 꽂은 채 모심던 농부의 낭만도 화로속 잿더미에 담배통을 묻은 채 열심히 목줄을 괴롭히던 할머니의 옛날 애기도 이제 그림속의 역사로 변하고 말았다. 살담배(칼 따위로 썬 담배, 각연초, 절초)가 권련, 여송연 등으로 바뀌면서 결국 고유의 담뱃대는 현대문명사회에서 사용가치를 상실한 채 이제 관상용(觀賞用)이나 기념품(紀念品)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도 담뱃대와 함께 30여년이상을 벗삼아 살아온 추씨는 보다 질 좋은, 보다 아름다운, 보다 사랑 받는, 또는 사용가치의 회복을 위해 오늘도 1평반 남짓한 스레트 까대기 작업장에서 땀을 훔친다. 『이거야 뭐 공방이라고 이름 붙일 순 없지요 다만 평생을 바친 정든 작업장이죠』 오수장날 우시장이었던 한쪽 구석 추씨의 연죽공방은 한달 전에 준공된 18평짜리 한식건물의 문간방이 돼 버렸지만 약간 작업장을 확장할 뿐 새 건물로 옮기지는 않는단다. 『작품 1개를 제작하는데는 평균3일이 소요됩니다.

매달 4∼5개정도 주문을 받아 만들고 있죠, 대부분 오동삼감연죽의 경우는 금과 은이 포함돼 한 개에 5∼7만원정도 받고 있죠.』 주문해서 생산하는 담뱃대는 맞춤 대라고 부른다. 주문하는 곳은 대부분 소수의 문화재 애호가들이거나 관광토산품판매업소로서 관상용(觀賞用)과 외국관광객의 기념품으로 활용된다. 한편 오교수는 『언젠가는 극소수의 생산마저 단절되어 시대의 유술로서 추억 속에 묻혀 버릴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말하면서『생활습관이 달라지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오동상감연죽의 필요성이 상실된 것은 당연한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기법을 바탕으로 생활에 필요한 공예품으로 개발해야된다고 주장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원형보존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원형보존은 전래의 (전통무형문화재(傳統無形文化財)를 보존한다는 뜻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공예품을 개발하기 위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남원군 덕과면 고정리 추기만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정열은 소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세 되던 해 왜정치하에서 특공비행대원에 응모하라는 강제통보를 받았다.

군유지들은 좋은 자리라며 특공대원이 될 것을 설득한 반면 부락사람들은 죽음과 통하는 길이라며 극구 몸을 피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정열은 전주사범학교에서 실시한 특공대원모집에 응시했다.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부모의 얼굴과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열은 불합격을 목적으로 오답을 작성 제출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정열은 왜놈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척추를 다쳐 그는 허리를 펴지 못하는 영원한 불구자가 된 것이다. 농사일을 할 수 없는 그는 생업을 찾던 중 덕과장터에서 오동상감연죽을 제작하는 박상근씨를 만나 상감일을 전수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박씨는 정열이 사사받은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후 임실로 이사 34년간 오동상감을 제작해왔다. 22살 때 김순남(金順南)씨와 결혼한 그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고 있는데 셋째 아들인 용근(容根)군이 3년전부터 아버지에게 상감일을 배우고 있다. 77년 10월 19일 추씨는 처음으로 제2회 중요문화재보유자 공예작품전시회에 백동연죽(白銅煙竹)을 출품, 문화공보부장관으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79년 9월에는 제3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시회와 제9회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 오동상감연죽을 출품 입상했고 같은 해 10월 제2회 전국산업디자인 전람회에서는 금상을 11월에는 제4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시회에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4백여년전인 1600년을 전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담뱃대는 그때부터 제작된 것은 압니다.』 담뱃대는 민담뱃대와 오동상감담뱃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민담뱃대는 장날마다 시장에서 살 수 있지만 오동상감담뱃대는 부유층이나 양반들에 의해서 애용돼 주문생산으로 그쳤다. 『담뱃대 제조의 본고장은 익산의 동래, 경남의 울산, 경기의 안성, 전북의 남원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남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모두 민담뱃대를 만들던 장인들이었고 오직 오동상감연죽은 남원에서만 생산됐다는 것이다. 『한때 각 지역의 연죽장은 백여명에 달했죠. 그러나 현재 7명정도가 남아 있겠지만 아직 오동상감담뱃대는 생산이 안된 것으로 압니다.

통백이와 무추리에 새겨지는 상감과 금, 은, 동, 아연 등의 합금처리는 아무나 못하는 법이죠』 담배통을 통백이라 부르고 물부리를 무추리라 부른다. 『통백이나 무추리를 만드는 금속의 성분은 백동으로서 구리1돈, 아연6푼, 니켈 1분의 합금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백동의 몸체 긴 부분의 일부에 은산 오동으로 상감한 것을 부착하고 장식해서 제품을 고급화하고 동시에 미적인 효과도 가져오는 것이죠.』 무늬는 비단 통백이와 무추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대통(설대)에도 불인두로 그림을 그려 넣는다. 설대는 대부분 함양이나 거창동지에 오죽을 사용하고 산죽(납죽이라 표현)을 쓴다. 제작공구는 거의 전통적인 원형이 그대로 전수되어 있었으며 박상근(朴相根)씨가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2백년이 넘은 대추나무 다듬목은 상처투성이인 채 추시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정만 하더라도 학정, 매화정, 태극정, 자사다리정, 눈깔정, 조각정, 육모정, 통백이정, 맨돌이정, 골정 등 15가지에 달한다.

또한 망치 역시 시금망치, 잔망치, 쳐냄망치, 중망치 등으로 구분되며 용해공구도 풀무, 풀무통, 목도리광대, 토리광대 등 광택공구 그리고 모릿독, 모릿쇠, 통고, 수추리통고, 목도리통고, 목도리통백이, 광대, 광쇠, 납판, 칼대, 개납판, 상납판, 잡음쇠 등 모두 40여종에 이른다. 오교수는 오동상감연죽의 연구목표를 첫째 기능이 잘 보존되고 계승도어 우리의 교육문화를 보호하는데 전래품 개발사업의 의의가 있으며 둘째는 시대에 알맞은 공예품으로 개발하고 생활용품화 시켜 나가는 것이 2차적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하고 금속장신구류에 오동상감 기법을 응용,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어쨌든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죽기능보유자를 위한 후계자 양성을 위해 갈망하던 중 다행히도 완주 봉동 제내리의 망건장 제작보유자 임덕수씨와 함께 80년 11월 17일 무형인간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임실군청 홈페이지
  55926 전북 임실군 임실읍 봉황로 131 TEL : 063-642-2211 FAX : 642-2213
COPYRIGHT2006.IMSIL CULTURAL CENTER ALL RIGHTS RESERVED